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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호텔 델루나> 그리고 목포의 가려진 시간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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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호텔 델루나> 그리고 목포의 가려진 시간
'지붕없는 박물관 목포'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주요 배경이 된 목포근대역사관. 이곳에서 우리는 역사 속에 가려진 지난 시간들과 마주한다. 무려 1300년 동안 살지도, 죽지도 못하며 이승을 떠난 귀신들만 쉬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호텔을 지켜야 했던 ‘장만월’(아이유 분)과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인간 ‘구찬성’(여진구 분)이 들려주는 특별한 이야기.
    최근 종영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주요배경은 제목 그대로 델루나라는 이름의 ‘호텔’이다. 떠돌이 귀신들에게만 화려한 실체를 드러내는 밤의 델루나가 세심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탄생된 공간이라면, 아름다운 붉은벽돌이 인상적인 낮의 델루나는 우리 현실 속에 실재하는 공간이다. 드라마 내내 숱하게 비춰진 신비한 이곳은 바로 목포근대역사관 본관. 드라마 제작진은 실제로 존재하는 근대식 건물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1900년 완공 당시 일본 영사관 용도로지어 사용됐지만, 현재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알리기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비밀을 품고 있는 드라마 속 호텔 델루나와 역사의 가려진 시간을 품고 있는 목포 근대 역사관. 왠지 묘하게 끌리는 이곳이 요즘 목포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등장한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은 사적 제289호 구 목포 일본영사관으로,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포의 설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1935년 가수 이난영이 발표한 곡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를 겪은 우리 민족의 한과 설 움을 진하게 담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왜 목포는 서럽게 눈물을 흘릴까? 아주 오래전부터 목포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됐으며 현재까지도 해군의 전략적 요지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요긴한 바닷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가 된 것이다. 목포는 1897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한 도시다. 대한제국 당시 고종의 칙령반포에 의해 ‘자주 개항’을 했지만 동시에 호남의 풍부한 곡물과 자원을 일제로 옮기는 역할을 맡게 됐다. 당시 목포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영산강 수로를 통해 나주, 광주 등 내륙까지도 화물운반이 가능해 수륙을 연결하는 거점이었다. 목포의 지리적 이점이 일제에 의해 악용되면서, 이곳은 눈물을 흘리는 서러운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해안에서 1㎞ 가량 떨어진 유달산 기슭에 위치한 사적 제289호 구 목포 일본영사관은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등장한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 또한 근대사가 남기고 간 일종의 상흔이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은 1900년 일본 영사관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다. 위치도 아주 좋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해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건물 평면은 장방형으로 중앙 바깥쪽으로 현관이 나 있고, 내부의 바닥은 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면에 모두 지붕면이 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로 구성된 우진각지붕으로 건물의 뚜껑을 완성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벽돌의 허리 돌림띠를 두었으며 창문 왼쪽과 오른쪽은 흰색 벽돌로 장식했다. 
    건물 내부의 소품들까지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벽난로는 대리석으로 치장했고 거울도 꽤 멋스럽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함께 근대 건축물로서 역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1981년 국가사적 제289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멋지고 견고하게 지은 르네상스 건축물은 겉보기에 꽤나 낭만적이다. 판타지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낭만 속에 가려진 지난 시간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역시 꽤나 서럽다. 

목포근대역사관의 여러 이름들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은 일제의 정치적 본거지이자 치열한 항쟁의 증인이었다. 1900년 1월, 당시 목포 일본 영사관으로 불리던 이 건물을 착공했고 같은 해 12월 완공됐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해안을 수비하기 위한 관청인 ‘만호청’을 빌려 사용했다. 그러다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했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목포일본 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 우편국 등을 함께 지었다.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됐지만 한일 간의 국제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914년부터 목포 이사청, 1974년부터 (구)목포 일본 영사관, 1990년 1월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를 거친 후인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불린다. 수많은 이름을 거쳐가는 동안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역사가 됐다.
 
01. 목포근대역사관 본관 내부 전시실      02. 구 목포 일본영사관 출구     03. 드라마 <호텔 델루나>스틸 컷

    그래서 <호텔 델루나>의 ‘레트로하고 멋진 호텔’을 상상하고 이곳을 찾은 여행객은 생각지도 못했던 역사의 조각들과 마주하게 된다. 역사관 본관 바로 아래 평화의 소녀상만 보더라도, 공간이 주는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본관 계단을 내려와 도로에 있는 푯돌도 유심히 봐야 한다. 커다란 돌에 ‘국도1·2호선기점’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돌이 있는 삼거리가 한국 도로 역사의 기념비적인 장소다. 국도 1호선은 목포에서 광주, 전주, 익산, 공주, 수원, 서울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939km 도로를 일컫는다. 더 멀게 본다면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뻗어갈 수 있는 유라시아 횡단로의 시작점이다. 국도 2호선은 목포에서 강진, 순천, 진주 등을 거쳐 부산까지 한반도 남쪽을 횡단하는 도로다.
    그야말로 세계를 관통하는 교차점이자, 관문인 셈이다. 일제는 영사관을 짓고 난 뒤 목포역과 함께 이처럼 사방에 도로를 건설하고, 인근에 행정기관을 설치해 완벽한 통제를 꿈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대가 바로 목표 근대사에 있어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지붕없는 박물관
    흔히 목포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일컫는다. 걸음마다 곳곳에 역사의 흔적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목포근대역사관을 검색하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도 함께 볼 수 있다. 2014년 이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 건물이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이었으나, 현재는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과거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구역 내에 위치한다. 목포근대역사관 별관, 즉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은 1920년 6월에 건립됐다. 조선의 토지를 근대적으로 측량한다는 명목하에 토지를 탈취해 간 곳이 바로 동양척식회사였으니, 본격적인 일제 수탈의 기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전국 9개의 지점 건물 중 목포가 가장 잘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현장으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내부로 들어가보면 목포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많은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지난 역사를 잊고 싶지 않다면 한 번쯤 가봄직하다. 당시에 사용하던 금고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해방된 이후에는 이곳이 경찰서로 용도가 바뀌어 금고가 유치장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 당시 목포의 모습과 함께 다수의 일제강점기 전후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했듯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공간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