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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모슬포 노오란 유채 물결 너머 선혈 머금은 시간이 일렁일렁
2024-04-05
문화 문화놀이터
근대와의 조우
제주 모슬포 노오란 유채 물결 너머 선혈 머금은 시간이 일렁일렁
'제주 섬 끄트머리 모슬포'
그 누가 제주에 '아름답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눈을 흘길까. 그러나 제주를 걷다보면 그저 아름답기만 한 섬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찬란한 별을 맞으며 걷는 중에도 이따금 사늘해지곤 하는 것은 그곳에서 선혈 머금은 아릿한 시간을 마주하게 되기에…. 제주 섬 끄트머리, 마라도행 여객선이 드나드는 모슬포 언저리를 걸었다. 노란 유채 물결도 덮지 못한 역사의 생채기가 그곳에 움푹 패어 있었다.
아름다운 제주를 일순간 사늘하게 만드는 풍경
옛 제주 사람들이 ‘모살개’라고 부른 모슬포. 모살은 모래, 개는 갯마을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행정구역이 바뀌는 시기에 모살개를 음차하면서 모슬포로 굳어졌다는 것이 정설인데, 말 자체는 모슬포항 일대 포구마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모슬포는 훨씬 너른 범주로 오늘날 서귀포시 대정읍을 아우른다.모슬포는 제주 남단의 몇몇 섬을 제외하고는 가장 남쪽 가장자리다.
이는 군사지역으로서 모슬포의 입지를 짐작게 한다. 읍성으로 축조되었던 대정성지와 모슬봉 꼭대기의 봉수가 이를 증명한다. 모슬포의 입지는 태평양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제의 눈에도 범상치 않게 보였을 테다.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는 모슬포 일대에 비행장, 격납고, 통신시설, 지하벙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사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정읍에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십여 곳에 달하고,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 이름 붙은 여행길이 펼쳐지게 된 배경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화유산은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1, 02)다.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는 대개 ‘알뜨르비행장’으로 통칭한다.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가 지금의 제주국제공항 자리에 구축했던 정뜨르비행장과 함께 구축했던 군사시설이다. 활주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비행장이라 부르기 머쓱해졌지만 전투기를 보관·정비·점검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한 격납고 19기가 청보리밭과 무밭 사이 드문드문 원형 그대로 남아 이곳이 비행장이었음을 일러준다. 풀로 뒤덮여 둔덕처럼 보이기도 하는 격납고 건설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 동원됐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비행기 자폭 테러를 위해 조직했던 가미카제 특공대가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는 것도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제주를 최후의 저항기지로 삼은 일제의 흔적
제주 올레를 알리는 간세 리본을 따라 격납고 앞으로 봉긋 솟아 있는 섯알오름에 이른다. 본래 제주의 오름은 제주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마을을 이루고, 밭을 일구기도 했던 삶의 터전인 동시에 신당을 마련해 제를 지내거나 묘를 쓰기도 한 신성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섯알오름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군정기를 지나는 동안 제주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가 돼버렸다.
오름 초입에서 마주하는 것은 ‘섯알오름 학살 터’ 표지판이다. 원래는 일제가 폭탄 창고로 삼았던 자리로 일본이 패망하며 미군이 폭파했다. 이때 오름 일부가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제주 4·3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 붙잡혔던 제주도민들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까지 당했다. 유족들의 노력으로 유해가 발굴되었지만 오랜 세월 이 참혹한 역사는 은폐되었고, 2000년대 들어 제주도 주관으로 학살터 정비사업이 이루어져 비로소 추모의 공간이 마련됐다.
한편 섯알오름 정상에는 일제가 알뜨르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고사포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3)가 버티고 있다. 고사포는 항공기를 사격하는 데 사용했던 대포의 일종이다. 일본 본토로 향하는 미군의 공격에 맞서는 동시에 알뜨르비행장을 경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섯알오름에서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송악산도 금방이다. 송악산에는 유독 굴이 많다. 우선 해안 절벽을 따라 뚫은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4)는 모두 17곳으로 일제가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연합군 함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송악산 제1분화구 안팎으로 구축한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는 적군의 연안 상륙에 대비하여 만들었다. 갱도식 방어시설로 폭이 1~2m로 협소하다. 확인된 입구는 모두 22곳으로 전체 구조는 지네 형태를 띠고 있다.섯알오름에서 송악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제주를 최후의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일제가 제주의 오름 곳곳을 갉아 먹은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의 청년들이 보내야 했던 치열한 시간들
광복 후 쓸모를 잃었어야 했을 일제의 군사시설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대구에서 창설되어 몇 차례 개창·예속 변경된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 모슬포에 자리 잡으면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강병을 육성하는 터전이라는 뜻으로 강병대라 명명된 이곳 모슬포 훈련소는 특히 신병을 훈련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이후 주인은 해병으로 바뀌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1) 그리고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2) 등 6.25전쟁 당시 우리 군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는 군사시설이 모슬포에 남게 됐다. 현재 예비군훈련소로 활용되고 있는 군사지역이지만 방문 등록을 하면 담당 군관의 안내에 따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훈련소에서 나와 마을 안쪽으로 향하는 길에 제주 현무암으로 쌓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교회 하나가 인상적이다. 1952년 훈련소장 장도영 장군의 지시로 건립된 남제주 강병대교회(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5)다. 장병들의 정신력 강화를 목적으로 교회를 지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기술자 없이 전선에 나서야 했던 어린 장병들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 어린 장병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을 쌓아 예배당을 만들었을까. 이 예배당에서 올린 기도는 살아 돌아오고야 말겠다는 자기 다짐이자 약속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노란 유채꽃이 바람결에 살랑이고 조랑말이 풀꽃을 뜯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비극의 역사가 모슬포 곳곳에 흩뿌려져 있으니 뜨거운 볕에도 불쑥불쑥 가슴 한쪽이 사늘해져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제주의 아름다움은 그 모진 시간을 견디어 내며 끝끝내 이 땅을 지켜낸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제주에 남은 비극의 흔적은 우리가 곱씹고 곱씹어야 할 평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감히 우리가 제주를 더욱 천천히 걸어야 할 이유라고 기록해 두고 싶다.
아름다운 제주를 일순간 사늘하게 만드는 풍경
옛 제주 사람들이 ‘모살개’라고 부른 모슬포. 모살은 모래, 개는 갯마을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행정구역이 바뀌는 시기에 모살개를 음차하면서 모슬포로 굳어졌다는 것이 정설인데, 말 자체는 모슬포항 일대 포구마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모슬포는 훨씬 너른 범주로 오늘날 서귀포시 대정읍을 아우른다.모슬포는 제주 남단의 몇몇 섬을 제외하고는 가장 남쪽 가장자리다.
이는 군사지역으로서 모슬포의 입지를 짐작게 한다. 읍성으로 축조되었던 대정성지와 모슬봉 꼭대기의 봉수가 이를 증명한다. 모슬포의 입지는 태평양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제의 눈에도 범상치 않게 보였을 테다.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는 모슬포 일대에 비행장, 격납고, 통신시설, 지하벙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사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정읍에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십여 곳에 달하고,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 이름 붙은 여행길이 펼쳐지게 된 배경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화유산은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1, 02)다.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는 대개 ‘알뜨르비행장’으로 통칭한다.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가 지금의 제주국제공항 자리에 구축했던 정뜨르비행장과 함께 구축했던 군사시설이다. 활주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비행장이라 부르기 머쓱해졌지만 전투기를 보관·정비·점검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한 격납고 19기가 청보리밭과 무밭 사이 드문드문 원형 그대로 남아 이곳이 비행장이었음을 일러준다. 풀로 뒤덮여 둔덕처럼 보이기도 하는 격납고 건설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 동원됐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비행기 자폭 테러를 위해 조직했던 가미카제 특공대가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는 것도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제주를 최후의 저항기지로 삼은 일제의 흔적
제주 올레를 알리는 간세 리본을 따라 격납고 앞으로 봉긋 솟아 있는 섯알오름에 이른다. 본래 제주의 오름은 제주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마을을 이루고, 밭을 일구기도 했던 삶의 터전인 동시에 신당을 마련해 제를 지내거나 묘를 쓰기도 한 신성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섯알오름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군정기를 지나는 동안 제주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가 돼버렸다.
오름 초입에서 마주하는 것은 ‘섯알오름 학살 터’ 표지판이다. 원래는 일제가 폭탄 창고로 삼았던 자리로 일본이 패망하며 미군이 폭파했다. 이때 오름 일부가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제주 4·3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 붙잡혔던 제주도민들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까지 당했다. 유족들의 노력으로 유해가 발굴되었지만 오랜 세월 이 참혹한 역사는 은폐되었고, 2000년대 들어 제주도 주관으로 학살터 정비사업이 이루어져 비로소 추모의 공간이 마련됐다.
한편 섯알오름 정상에는 일제가 알뜨르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고사포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3)가 버티고 있다. 고사포는 항공기를 사격하는 데 사용했던 대포의 일종이다. 일본 본토로 향하는 미군의 공격에 맞서는 동시에 알뜨르비행장을 경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섯알오름에서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송악산도 금방이다. 송악산에는 유독 굴이 많다. 우선 해안 절벽을 따라 뚫은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4)는 모두 17곳으로 일제가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연합군 함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송악산 제1분화구 안팎으로 구축한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국가등록문화유산)는 적군의 연안 상륙에 대비하여 만들었다. 갱도식 방어시설로 폭이 1~2m로 협소하다. 확인된 입구는 모두 22곳으로 전체 구조는 지네 형태를 띠고 있다.섯알오름에서 송악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제주를 최후의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일제가 제주의 오름 곳곳을 갉아 먹은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의 청년들이 보내야 했던 치열한 시간들
광복 후 쓸모를 잃었어야 했을 일제의 군사시설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대구에서 창설되어 몇 차례 개창·예속 변경된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 모슬포에 자리 잡으면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강병을 육성하는 터전이라는 뜻으로 강병대라 명명된 이곳 모슬포 훈련소는 특히 신병을 훈련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이후 주인은 해병으로 바뀌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1) 그리고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2) 등 6.25전쟁 당시 우리 군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는 군사시설이 모슬포에 남게 됐다. 현재 예비군훈련소로 활용되고 있는 군사지역이지만 방문 등록을 하면 담당 군관의 안내에 따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훈련소에서 나와 마을 안쪽으로 향하는 길에 제주 현무암으로 쌓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교회 하나가 인상적이다. 1952년 훈련소장 장도영 장군의 지시로 건립된 남제주 강병대교회(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5)다. 장병들의 정신력 강화를 목적으로 교회를 지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기술자 없이 전선에 나서야 했던 어린 장병들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 어린 장병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을 쌓아 예배당을 만들었을까. 이 예배당에서 올린 기도는 살아 돌아오고야 말겠다는 자기 다짐이자 약속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노란 유채꽃이 바람결에 살랑이고 조랑말이 풀꽃을 뜯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비극의 역사가 모슬포 곳곳에 흩뿌려져 있으니 뜨거운 볕에도 불쑥불쑥 가슴 한쪽이 사늘해져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제주의 아름다움은 그 모진 시간을 견디어 내며 끝끝내 이 땅을 지켜낸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제주에 남은 비극의 흔적은 우리가 곱씹고 곱씹어야 할 평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감히 우리가 제주를 더욱 천천히 걸어야 할 이유라고 기록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