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을 2회 수상한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겸 칼럼니스트는 요즘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사명을 갖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Visual History of Korea’ 프로젝트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그를 종묘에서 만나 보았다.
빛나는 명성에서 얻은 건 겸손함 강형원 사진기자는 1977년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친 그는 LA타임스, AP통신, 백악관 사진부, 로이터통신 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며 평생 한 번도 받기 힘들다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으며 사진기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UCLA에 다닐 때 학교 일간지 기자로 일을 했습니다. 주변에 상가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학교 신문임에도 광고비를 받을 수 있어서 학생기자도 어느 정도 보수를 받았어요. 그 당시 사진기자를 하면서 얻은 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대한 깨달음이 었습니다. 세상을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우게 된 거죠.”
학교신문사에서 주 70시간 이상 일했던 강형원 사진기자는 그 이력으로 미국 전역에서 단 1명을 뽑는 LA타임스 사진기자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유수의 언론기관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모든 순간을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The Humbling Experience)’이었다고 표현했다. 동료 사진기자에게 “네 사진은 진짜 대단하다”라는 얘기를 들었던 순간에도 자신보다 더 잘 찍는 사람은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라는 그의 말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그 찬란했던 시절에도 자신의 언행을 다스렸던 근간이 되었다.
유수의 언론기관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모든 순간을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The Humbling Experience)’이었다고 표현했다.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 세상의 편견을 움직인 사진 한 장 신문기자로 일했던 시기, 사건과 사고 현장은 늘 그의 일터였다. 미국 LA폭동 때도,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 때도, 6.10 민주항쟁 때도 그는 늘 무기처럼 카메라를 장착한 채 현장을 누비면서, 누구보다 적확하고 왜곡 없는 사진으로 세상을 설득하고 변화를 일으켰다.
세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1992년 LA폭동 사진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폭력을 행사한 백인경찰에게 분노한 흑인들이 일으킨이 폭동은 어느 순간부터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으로 변질되었고, 한인들은 가족과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방탄조끼와 카메라를 들고 그 전쟁 같은 곳으로 뛰어든 강형원 사진기자의 사진은 증오와 갈등의 현장을 마침내 화해와 평화의 길로 이끌었다. 말 그대로 세상을 시각적으로 해석해 사회의 흐름을 바꿨던 절정의 순간이었다. 강형원 사진기자의 사진 한 장으로 동양인 남자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과 나약하다는 편견을 깨부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말을 시켜보고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들어요.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야 진정한 지식인 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인종차별을 덜 느끼기 시작했던 건 미국 사람보다 더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하기 시작했던 때였어요. 미국인은 정당한 논리를 표현하는 사람을 감히 차별하지 못합니다. 언어의 힘이 그만큼 강한 거죠.”
동양인이었던 그가 백인이 주류로 있는 언론사 사진팀을 이끌고 퓰리처상을 2번이나 탈 수 있었던 것도 리더로서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정확히 제시하고 뛰어난 논리와 이해로 설득해 팀원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근간이 되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죠. 이것이 제가 문화유산을 기록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