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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깃든 겨울나무가 따듯하다

2021-01-25

라이프가이드 여행


충북의 숲과 나무?청주
옛 이야기 깃든 겨울나무가 따듯하다
'충북의 오래된 나무와 마을 숲을 찾아..'

    신단수(신성한 나무 혹은 숲)는 제정일치 사회에서 공동체의 정신과 생활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었다. 그 맥이 이어져 마을의 안녕과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해마다 일정한 날 특정한 나무에 당제를 올리는 풍습은 지금도 전해진다. 마을 어귀 동구나무(정자나무)는 마을의 경계이자 이정표였다. 향교와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었던 것은 병충해가 잘 슬지 않는 나무의 특성에 빗대어 관직에 나가서도 부정부패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을 마다 내려오는 전설과 설화, 역사의 증거가 되는 나무들도 있다. 그런 나무들이 지금도 해마다 새 순을 틔우고 꽃 피고 열매를 맺는다. 수백 년 동안 살고 있는 나무의 푸르른 생명력, 그 나무들이 이룬 숲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숲은 마을을 감싸고 사람들은 숲을 찾는다. 충북에 있는 오래된 나무와 마을 숲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 길에서 만난 나무와 숲의 이야기를 지자체 별로 묶어 소개한다. 
 
대성동 마을 꼭대기에서 본 풍경. 향교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도심을 굽어보는 듯 하다.
 
봉황송과 것대마을 은행나무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은 봉명2송정동행정복지센터 일대의 형국이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옛 백봉산 자락이었다. 지금은 백봉공원이 있어 옛 백봉산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백봉산 자락에 있는 봉송어린이공원은 코로나19와 한파 때문인지 노는 아이들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다. 깔깔거리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길을 돌리는데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여행자를 반긴다. 소나무 옆 유래비에 봉황송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봉황송 유래비에 따르면 백봉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의령 남씨 집성촌이 있었다. 조선 개국공신 남은이 그 가문이다. 남은의 후대 사람 응호와 응수 형제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이 됐다. 응호의 아들이 조선 광해군 때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소나무가 봉황송이다. 약 400년 정도 된 소나무다. 보호수 가운데 누가 언제 심은 나무인지 밝혀진 보기 드문 나무다.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것대마을에는 53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있다. 것대산 서쪽은 용정동과 명암동이다. 동쪽은 산성동과 낭성면이고 낭성면을 벗어나면 미원면이다. 옛날에 미원과 낭성 사람들이 청주 장을 오가며 넘던 고개가 것대산 것대고개(상봉재)였다. 소를 몰고 청주 장으로 가는 사람들, 등짐을 지고 것대고개를 넘던 장꾼들, 장구경에 콧바람 쐬러 청주 장을 찾던 옛 사람들의 발길을 지켜보았을 것대마을 은행나무다.
    잎 다 떨군 것대마을 은행나무 아래 서서 해거름 것대고개 능선에 선 겨울나무들을 바라본다. 지금도 그 고개를 넘는 누군가가 해지기 전에 산 아래 마을로 가는 발길을 재촉하고 있을 것 같았다.   
 
것대마을 530년 넘은 은행나무
 
중앙공원 900년 은행나무, 압각수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중앙공원에는 900년 넘게 살고 있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흙을 움켜쥔 뿌리와 나뭇잎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라고 부른다.
    청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 중 압각수 앞에서 사진 한 장 안 찍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압각수 주변에 사진사가 있었다. 압각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주소를 일러주면 주소지로 사진을 보내주거나, 사람들이 사진을 직접 찾으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된 요즘도 은행나무 단풍 들 때면 압각수 앞에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추억을 잊지 못한 사진사 아저씨들도 간혹 사진기를 메고 이른바 ‘개똥모자’를 쓰고 단풍처럼 늙은 마음으로 압각수 아래를 서성이기도 한다.
    압각수는 고려시대 청주목의 객사 앞에 있었던 여러 나무 가운데 하나다. 다른 나무는 다 죽고 압각수 하나만 살아남은 것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횡포와 왕권의 약화, 대내외 정세로 인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 새 나라를 열자는 이성계 정도전 남은 등에 반대하던 이색, 권근 등이 청주옥에 갇히게 됐다. 그 무렵 청주에 큰 장마로 인해 물난리가 났고, 옥에 갇혔던 이색, 권근 등이 압각수에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점령당한 청주읍성을 탈환한 청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 최초의 승리였다. 당시 청주성 탈환에 공이 큰 조헌, 영규대사, 박춘무 등의 뜻을 기리는 비석이 압각수 주변에 있다. 충청도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었던 건축물도 남아 있다. 충남 서산시 해미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을 1651년 청주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교통의 요충지인 청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이때부터 청주읍성은 관청의 역할과 함께 병영의 역할을 병행하게 됐다.
 
(左) 중앙공원 압각수 가을 단풍    (右)당산 꼭대기 운동장
 
당산과 대성동
    대성동 아이들은 당산이 놀이터였다. 숲을 누비며 집게벌레를 잡고, 새총을 만들어 새총 싸움도 했다. 당산 꼭대기는 너른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에 선을 긋고 ‘오징어가이상’이란 놀이를 했다. 몸으로 힘을 겨뤄야 하는 놀이에 한겨울에도 땀범벅이 되곤 했다.
어른들은 당산에 귀신이 산다며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당산 숲길을 오를 때에는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당산의 큰 나무에는 무슨 줄이 묶여 있었고, 그 나뭇가지에 간혹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도 보았다. 그런 날이면 신나게 놀다가도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깊은 밤, 아니면 새벽녘, 부엉이인지 소쩍새인지 모를 새 울음소리가 흉흉하게 들리는 곳은 당산 쪽이었다.
    40여 년 만에 당산에 올랐다. 앙상한 가지 서로 얽어가며 겨울을 이겨내는 당산의 나무들이 반가웠다. 너른 운동장이었던 당산 꼭대기로 가는 길, ‘청주지역 적대세력 사건 희생지’라는 안내판을 만났다. 한국전쟁 당시 퇴각하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충북의 공무원, 경찰, 우익 인사 등이 학살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당산이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당산에 귀신이 산다고 한 말이 이것 때문이었나 했다.
    당산에 백제시대~통일신라시대 건축된 토성이 있었다는 안내판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산이 청주 치소의 동쪽 1리에 있는 청주의 진산이라 했다. 우암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이 청주 도심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밀어올린 봉우리가 당산이었다. 우암산과 당산 사이에 대성동이 자리 잡고 있다. 당산에서 대성동으로 가는 길은 포장된 도로였지만, 산줄기의 맥이 이어지는 능선과 고갯길이기도 했다.
    대성동 마을 꼭대기, 우암산으로 오르는 오솔길 입구에서 대성동과 당산, 그리고 멀리 도심의 풍경까지 한눈에 넣는다. 멀리 향교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보인다. 빈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지만 둥그렇게 퍼지며 자란 거대한 나무에서 푸근함이 느껴진다. 겨울나무가 따듯하다. 어린 시절 도심에서 들리던 크리스마스캐럴 같은 70년대 골목이 대성동으로 내려가는 숲길 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