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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돌에서 언어를 줍다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돌에서 언어를 줍다
'글. 최명임'

    흔적만 남은 고향 집에 돌담이 버티고 있다. 담쟁이도 여전히 떼를 쓰며 기어오르고 간간이 참새 떼가 다녀간다. 인동초는 맺힌 것이 많은지 꽃으로 울고 있다. 그들의 안간힘이 눈물겹다.
    이끼가 검버섯처럼 피어버린 돌을 주섬주섬 집어왔다. 산골 그 애틋한 고향을 내 삽짝에 옮겨놓고 꿈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 집 돌은 나를 닮아 세련미나 멋스러움이 없다. 촌티가 풀풀 나지만 우리 집 내력과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볼 때마다 정겨움을 느낀다. 까닭 없이 눈물이 나는 날도 있다. 
    산을 일구며 모아 둔 돌로 세 번째 탑까지 완성했다. 대추나무 사이로 설핏설핏 보이는 돌탑은 수석의 가치를 능가한다. 그만 돌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나둘 줍다 보니 우리 집 마당에 전국구의 돌이 모였다. 개성을 가지고도 조화롭다. 마주하고 있으면 그들의 수런거림이 들려오는 듯하고 명상음악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몇 해를 두고 돌을 하나씩 주워 모을 때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요즘 와서 푹 빠져버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는데 그냥 좋아서라고 대답한다.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에 대한 내 사랑이 한 가지 이유에 국한되는 것이 싫어서다. 아예 주말마다 행장을 차리고 나선다. 남편도 어느새 즐기는 수준까지 왔다. 돌이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돌을 좋아하니 나도 좋고 당신이 즐거워하니 나도 즐겁다.’라고 대답한다.



    어느 날 혼곤히 잠든 아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목이 메어 오더란다. 산전수전 다 겪어낸 아내의 흰머리가 가슴에 걸려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당신에게 잘할게.’ 요즘 와서 그 말을 자주 한다. 말을 아껴야 남자라더니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한다. 돌의 상처가 승화되면 수석이 되듯이 가시 박힌 삶의 흔적들로 그가 익어가는 것일까.
    돌밭에 서면 흥분해서 눈이 아프도록 돌을 걸러낸다. 수석의 조건은 무시하고 내가 좋으면 취한다. 일방적이라고 하지만 무늬와 색깔과 생김부터 살피는 이유는 은연중 드러나는 수석에 대한 내 욕심일 것이다. 흔하디흔한 돌에서 행복을 줍는다. 행복의 조건은 대단한 무엇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수필을 접하고 푹 빠졌을 때처럼 꿈을 꾼다. 꿈에서도 글을 써 내려갔듯이 돌을 찾아 산으로, 강으로 헤매는 꿈을 꾼다. 꿈에서는 항상 마음에 드는 수석을 발견하는데 어떤 날은 수석에서 내뿜는 찬란한 빛으로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진정, 수석을 줍고 싶은 내 속내가 부끄럽게도 그만 꿈에서 드러나 버린다. 
    처음 눈에 들어왔던 돌이 있다. 하얀 실타래를 풀어 옴짝달싹 못 하도록 칭칭 동여맨 모습이 신기했다. 빼도박도 못 하는 인연의 사슬에 묶여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같고, 나인 것도 같았다. 가끔 물을 뿌리면 까만 돌을 묶고 있는 새하얀 실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묶어놓은 실을 되감아 그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면 그때도 돌에 의미를 둘 수 있을까. 지난한 어머니의 삶이라서 내 눈에 더욱 빛나 보였듯이, 무미한 돌은 얽어맨 사슬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목도리를 한 올빼미도 있다. 부스럼쟁이, 생각하는 병아리, 무희, 아기공룡 둘리, 애벌레, 만삭의 어미도 있다. 이름은 그럴듯한데 주제가 희미한 나의 글처럼 모호하다. 수필로도 수석으로도 깜냥이 되지 못하지만, 스스로 취해서 희열에 빠져있다.



    사람멀미에 속이 울렁거리고 말의 소음에 두통이 나는 날이 있다. 사람 안에서 사람을 알아가고 사람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사람을 벗어나 돌밭에 서면 날아갈 듯 가벼움을 느낀다. 결벽증일까.
    수년을 지켜보아도 돌의 언어는 간결하다. 바람과 물살에 승화된 가슴과 무색무취한 산소로 빚어내는 웅숭깊은 언어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사람의 언어도 그랬으면 좋겠다. 돌을 줍는 날은 나의 언어도 돌을 닮아 가는지 음전해진다. 돌밭에 앉으면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는데 돌밭에 누우면 나도 돌이 될 것 같다. 붓방아질을 하다가 잡다한 언어로 사설만 늘어놓은 내 글도 언젠가는 돌의 언어처럼 간결해지려나. 한 편의 명수필로 내 글에 정점을 찍게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모든 일의 완성을 들여다보면 열정과 눈물과 시간의 결정체로 이루어져 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시루에 떡쌀을 안치고 불을 때기 시작하면 떡이 다 익을 때까지 말문을 닫았다. 좀이 쑤셔 어머니 곁을 맴돌면서 앙알앙알해도 소리 없는 언어로 나를 내치셨다. 설마 언어의 해악이 떡에까지 미칠까 싶은데 이제야 절절하게 공감한다. 어머니도 나도 떡이 다 익어야 말문을 열었는데 그때처럼 진득한 기다림이 필요하겠다. 어설픈 내 글이 수필로 격상하는 일도, 돌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돌을 줍는 일은 신변잡기에 머물러도 좋겠다. 값비싼 수석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욕심이 요동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돌의 순수한 언어마저 그 욕심 안에 매몰되어 버릴까 봐 겁이 난다. 
내가 쓰는 글 또한 염려스럽다. 단지 신변잡기에 머물러 나아갈 줄 모른다면 끝내 무지렁이로 남을 테니. 울퉁불퉁한 돌에서 언어를 줍듯이 삶의 모퉁이에 새겨진 진정한 언어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