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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굼벵이의 영혼에 바침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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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굼벵이의 영혼에 바침
'글. 이정연'

    상추는 씨를 뿌리고 나서 한 한 달 보름 정도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란다. 물론 토양이나 일조량 수분 등 생육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파종한 밭엔 그랬다. 봄 상추에 재미 들려 잘 먹었고 여름 상추를 뿌리고 한 달쯤 지나 한창 예쁘게 자랄 즈음 상추는 한 포기씩 이유 없이 그대로 내려앉아 시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벌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거름에 문제가 있어 뿌리가 썩은 것인가. 다음날 가보니 또 상추가 그렇게 내려앉아 시들어 있었다. 들어보니 뿌리가 없다. 역시 땅이 문제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땅이 뿌리를 썩게 하는구나. 땅이 어머니처럼 상추를 키우지 않는 데야 난들 어쩔 수 있으랴. 다만 더 이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든 상추들 걷어내 버리고 호미로 정성 들여 주위 땅을 긁어 주었다. 혹시 땅이 뿌리를 썩게 하는 거라면 뿌리에 공기라도 통하면 좀 나을까 싶어서였다.



    다음날 가보니 더 상추가 썩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 농작물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게 맞는 말인가 봐. 내일은 먹을 수 있겠지. 내일은 하면서 상추포기를 들여다보고 돌아온 다음 날 밭에 가보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상추 두 포기가 한꺼번에 시들어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아니지 땅이 문제라면 함께 붙어있는 다른 포기도 시들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뿌리를 갉아 먹고 있는 어떤 녀석이 있는 거야. 내려앉은 포기 근처를 호미로 깊이 파고 흙을 낱낱이 파헤쳐 보았다.
    마침내 범인을 잡았다. 녀석은 굼벵이였다. 말간 피부에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깨끗한 녀석이었다. 화가 나서 호미로 콱 찍어 버릴까 아니면 발로 사정없이 뭉개서 제 삶의 터에서 다시 거름이 되게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 순간 88년도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는 말기 폐암 환자로 보름 동안의 시한부를 선고받고 병원에서도 쫓겨나 집에 누워 계실 때였다. 의사는 어머니를 포기했지만 나는 결코 어머니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온갖 민간요법을 뒤지던 내 눈에 여러 민간요법 책에서 공통으로 눈에 띈 게 굼벵이였다. 옹기에 넣고 발효를 시켜 어쩌고 하는 건 밀쳐두고 당장 어머니께 시행할 수 있는 요법을 보니 굼벵이를 삶아 그 물을 마시면 된다는 거였다. 이 도시에서 굼벵이를 구할 재주는 없다. 나는 즉시 고향 먼 친척 오빠한테 전화를 넣어 주말에 갈 테니 굼벵이를 좀 잡아 달라고 했다. 오빠는 어머니의 상태를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가능한 한 많이 잡아 놓을 테니 일요일에 오라고 했다.



    일요일이 되기 무섭게 고향으로 달려갔다. 오빠는 종이에 싼 굼벵이를 보여 주면서 마을의 두엄더미를 다 뒤졌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얼마 안 된다고 미안해하면서 한 홉쯤 되는 굼벵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평소 같으면 굼벵이 한 마리를 보고 기겁할 숙녀였지만 그때 내게 굼벵이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다. 서둘러 돌아와 굼벵이를 깨끗이 씻어 중탕했다. 따뜻한 두엄더미 속에 평화롭게 살다가 날벼락을 받고 잡혀 온 여린 생명! 한두 해 뒤면 너희들은 뜨거운 여름을 노래할 것이지만 이렇게 생을 마치게 되는구나! 미안하다. 가엾은 굼벵이의 영혼들아! 나는 눈물의 기도를 바쳤다.
    중탕한 굼벵이를 면포에 곱게 받쳐내고 어머니께 들고 갔다. "버섯 달인 물이에요 엄마 이게 엄마 병엔 그렇게 좋대요." 다행히 어머니는 내가 한 숟갈씩 떠 주는 그 물을 끝까지 다 받아 드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자꾸 잠이 온다.' 그러시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을 넘나드셨다. 며칠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가시는 날까지 나한테 차 조심하라고 이르고 눈을 감으셨다.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굼벵이를 근처 풀숲에 놓아 주었다. 그 한 마리뿐이 아닌지 상추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그렇게 시들었다. 나는 더 굼벵이를 잡지도 땅을 파헤치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밭에 뿌린 상추가 알맞게 자라서 식탁에 올렸다. 며칠 전에 가보니 상추가 이제 한 포기 남았다. 저 상추가 다 없어지면 그때 저 여린 생명에게 저지른 내 무차별 학살도 용서가 될까. 해마다 여름은 오고 나는 또 시원한 매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때는 잔혹한 학살의 추억 대신 혹시 저 소리가 그때 내가 놓아준 녀석의 노래인가 이 추억만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