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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2021-05-18

라이프가이드 여행


성큼성큼 팔봉산,은적산 따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마을 궁현리/활고개/효충사/대를 이은 시묘살이'

    계절의 첫 눈물이 구름을 열고 지상으로 떨어진다. 타오르던 대지를 두드리는 최초의 타건打鍵. 연잎 푸른 방죽의 빗소리는 그 자체로 음악이다. 이 비 그치면 여름의 숨결은 향기로워지리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잎 위를 구르던 빗물같이 
진흙 속에 꽃등을 켜다 _ 연꽃마을 궁현리
    여름날 연꽃방죽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빗방울이 초록을 머금은 연잎들을 건반처럼 두드릴 때, 빗소리는 그대로 계절이 연주하는 소나타가 된다. 그 향기로운 음악을 듣기에 좋은 곳이 은적산 북서쪽에 자리 잡은 궁현리다.



    전에는 주로 벼농사를 지었는데 2001년부터 논과 연못에 연꽃을 심어 농촌체험마을로 거듭난 연꽃마을 궁현리. 연꽃마을이 그야말로 꽃처럼 향기롭게 피어나는 시절은 7월말에서 8월초다. 초여름인 6월부터 연잎의 초록이 싱그럽게 빛나고 간혹 일찍 피어난 연꽃송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곳곳에 펼쳐져 있는 방죽과 습지들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즐겨도 좋고, 걷다가 보이는 정자에서 다리를 쉬며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에 마음을 맡겨도 좋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핀다. 등불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하나씩 초록의 발원문을 단 연등처럼 살아있는 연꽃 등불을 환하게 켠 방죽을 거닐며 생각한다. 생의 진흙탕인 줄로만 알았던 지나간 어떤 시간에서도 이토록 환한 꽃송이 하나 피어날 날이 있을 거라고. 
    <향기로운 연꽃마을 체험> 은적산 자락 궁현리 연꽃마을에서는 숙박과 식사, 현장학습이나 체육대회 같은 단체 모임이 가능하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마을에서 운영하는 황토방에 1박을 하며 연잎밥을 먹고, 연꽃 지짐이나 연꽃차 만들기, 방죽에서의 낚시, 고구마 캐기 같은 체험활동을 할 수도 있다. 연꽃은 6월에서 9월 사이에 볼 수 있다. 
둥구나무 굽어보는 언덕의 전설 _활고개 이야기
    여름 가고 가을이 오면 연꽃마을의 꽃 잔치는 잦아든다. 하지만 축제가 끝나도 삶은 계속되지 않던가. 꽃이 모두 지고나면 연잎은 초록을 잃지만 꽃 진 자리에 연밥이 맺히고 연못속에서는 연근이 굵어지며 단맛을 품고 여물어간다. 그즈음 궁현리 마을을 굽어보던 둥구나무의 이마도 단풍에 물들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붉고, 노란 계절의 신호등이 바람에 날리며 경고를 보낸다. 한번쯤 물들어보라고, 내려놓아 보라고, 홀연히 사라져 보라고.
 
궁현리 둥구나무

    어쩌면 궁현리 둥구나무는 마을에 내려오는 오랜 전설을 그렇게 일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삼국시대에 백제의 진장군이 살았는데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그만 패하고 말았다고. 돌아가 왕 앞에 조아리고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었으나 장군은 다른 길을 택했다고. 그이는 자신이 쓰던 활을 꺾어버린 뒤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로부터 이곳이 활고개, 궁현弓峴이라 불렸다고. 연꽃 만나고 온 바람도 둥구나무 가지에서 옛이야기 듣는다. 
하늘도 감동한 효자마을 _ 연정리 효충사
    창골추압蒼?墜鴨. 송골매가 날아가며 오리를 떨어트렸다.
    그것을 어머니께 공양했더니 묵은 병이 나으셨다.
    _‘모계집’ 제2권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지고 고향이라는 것, 가족이라는 것, 더구나 효라는 것은 점점 옛이야기가 돼 간다고. 그러나 과연 그런가. 연꽃마을 궁현리와 이웃한 연정리에서는 500년 동안이나 현실로 이어지는 놀라운 효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연꽃 향기보다 그윽한, 어쩌면 믿을 수 없는 효의 대물림이다. 시작은 ‘창골추압’이란 사자성어를 탄생시킨 효자 조강趙綱(1527~1599)에서 비롯되었다. 
 
(左)효충사 현판   (右)효충사

    한양 조씨인 모계 조강은 1540년쯤 목천에서 연정마을로 옮겨왔다. 이때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정자를 지어 마을이름이 연정蓮亭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연정마을에서 살던 중 어머니가 큰 병이 들었는데, 한여름에 오리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효자 조강은 오리를 구하려 매일 울면서 벌판을 헤맸다. 그러자 하늘이 감동하여 송골매를 시켜 오리를 떨어트려 주었고, 어머니가 그것을 먹고 병이 나으니 창골추압이란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한편 조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청주 솔고개에서 적을 기습, 큰 전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지금도 한양 조씨의 세거지인 연정마을에는 조강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며 그의 충심과 효심을 기리는 효충사가 있다. 
    <효충사와 효자마을 연정리>
    한양 조씨의 선조인 조순생, 조명, 조강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 효충사다. 지금의 건물은 1929년 건립 후 보수해온 것이다. 효충사 앞에는 상현재라는 강당이 있고, 담장 옆에는 조강의 직계손으로 6년의 시묘살이를 한 효자 조병천의 추모비가 있다. 또한 문의문화재단지에는 조병천의 아들인 조육형 옹이 3년간 시묘를 살던 여막이 복원돼 있다. 
 
(左)상현재  (右)연정리 풍경
 
효자는 효자를 낳고 _ 대를 이은 시묘살이
    효충사가 있는 연정마을에서 그 옛날 조강이 파놓았다는 연꽃 연못이나 정자를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한양 조씨 집안의 향기로운 내력은 500년 뒤에도 연정리에 효자 이야기를 꽃피게 한다. 조강의 직계후손인 조병천(1909~2000)은 부친의 사후 여막을 짓고 3년간 생식을 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그 뒤 선친의 묘소를 옮기게 되자 다시 3년의 시묘를 살아 과연 조강의 후손다운 효심이라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