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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발자취와 풍경

202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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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미래
시장의 발자취와 풍경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문명 교류의 장'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장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찾는 핸드폰부터 죽어서 입는 수의까지 우리의 일상은 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촌 전체가 시장 상품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혀 움직이고 있다.


 
시장의 변천사, 장보기에서 손가락 클릭으로
    시장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온달이 ‘떨어진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고 저잣거리를 왕래’했고, 백제의 가요 정읍사에는 저자를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며, 신라에서는 반역자를 시장에서 처형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종로 일대에 시전(市廛)이 들어서 서울 주민들의 생활 물품과 왕실·관청의 수요품을 판매했고, 남대문·동대문 일대에 칠패(七牌)·배오개[梨峴]장이 들어서 시전과 경쟁하며 성장했다. 전국 각지에는 수많은 장시가 들어섰고, 송파장·강경장·전주읍내장·마산포장 등이 큰 장시로서 명성을 떨쳤다.
    19세기 후반 한국은 세계 각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장과 서울에는 외국 상인이 밀려들어 이른바 ‘물 건너온’ 상품이 쏟아졌다. 특히 서울의 명동에는 청나라 상인이, 진고개(현 충무로)에는 일본 상인이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고 조선 시장을 잠식해 갔다. 이에 종로 시전은 근대적 상가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자본과 가격경쟁력 등에서 밀려 고초를 겪었고, 칠패와 배오개장은 자리를 옮겨 각각 남대문·동대문시장으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左)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 중 <행상>. 길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을 그린 모습이다 (©문화재청)     (右) 1900년 무렵 서울 남대문시장의 모습

    현대 한국의 시장은 1945년 광복 후부터 급격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폭발적 성장을 경험했다. 서울의 시장은 1961년 44곳에서 1979년 334곳으로 폭증했고 1980년대까지 성장을 거듭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쇼핑몰의 급성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80년대 한국의 유통시장이 개방되고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시장에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대형 할인점(마트)이 등장해 유통업계의 총아로 급부상했으며, 24시간 편의점은 구멍가게를 밀어내고 골목골목까지 스며들었다. 가장 혁명적 변화는 장소가 사라진 TV와 인터넷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전자상거래의 등장이다. 지금은 책상 위의 컴퓨터와 손안의 핸드폰을 클릭하여 원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옛날 장을 보러 다니던 사람들은 손가락 클릭으로 상품을 사는 오늘을 상상이나 했을까?

시장의 상품, 짚신에서 핸드폰으로
    시장에는 수많은 상품이 진열되어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장의 상품은 각 시대와 나라의 풍습·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며, 문명 교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상품 중에는 쌀·채소·과일과 같이 지속적으로 중요 상품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있고,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품도 있다. 삼국·고려시대 시장에는 곡물·옷감 등의 의식주 관련 상품과 문방구·장식품·약재·동물가죽 등이 거래됐으며, 멀리 서역에서 건너온 로만 글라스와 같은 상품도 있었다.
    조선시대 시장에는 감자·고구마·고추·담배·다리와 같은 새로운 상품이 등장했다. 임진왜란 후 유입된 감자와 고구마는 흉년에 굶주림의 고통에서 백성을 구원한 식품이었고, 고추는 붉은 김치와 고추장의 탄생을 가져와 식생활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상품이며, 담배는 남녀가 모두 즐기던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리는 여인의 머리에 쓰는 가발 같은 것으로 무게가 보통 3~4㎏에 달했으며, 다리를 올린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서다가 목이 부러져 죽은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서울 시장에는 타국에서 수입한 열대 과일 용안·여지와 아라비아산 회회포, 서양목면 등이 판매됐다.
    근대 한국 시장에는 영국산 카네킨(면포)과 베트남 쌀, 미국산 담배·재봉틀, 개화인의 음료인 맥주와 커피, 시계, 자전거, 성냥, 석유, 비누 등 수많은 수입상품이 진열되어 판매됐다. 그중 커피는 고종황제가 매우 즐기던 차로, 황제의 커피에 독약을 넣어 살해하려는 독다사건(毒茶事件)이 발생하기도 했다.
    성냥은 화로에 불씨를 보존해야 했던 여성들을 불씨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킨 상품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은 성냥을 처음 보고 ‘귀신의 재주’처럼 신기하게 여겼다. 일제강점기에는 만년필·고무신·연탄 등이 주요 상품으로 등장했다. 특히 물이 새지 않고 질긴 고무신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장난감 권총은 친일파 지주나 부호를 위협하여 독립자금 요구에 이용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이 TV·냉장고·세탁기·전자레인지·에어컨 등의 가전제품과 컴퓨터·핸드폰 등 최첨단 상품들이 등장해 일상의 혁명적 전환을 이끌었다. 우리가 가난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장에는 구호식품으로 나누어주었던 C-레이션(미군 휴대식량)과 미제 담배 등이 흘러나와 판매됐고, 바나나·커피 등은 외화를 낭비하는 상품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유통시장이 개방된 후에는 외제 상품이 물밀 듯이 들어와 한국 시장은 세계 각국 상품의 진열장이 됐다.

 
성남 모란시장. 경기도 최대 오일장 성남 모란 시장은 재래 시장과 현대 시장의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다 (ⓒ성남시)
 
시장의 이모저모, 죄인 처형에서 행사와 축제까지
    시장은 수많은 사람과 돈이 오가고 상품이 거래되는 곳으로, 무수한 이야기와 사건, 사고가 넘쳐난다. 과거 시장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항한 ‘반역자’와 간통, 살인범 등이 처형됐다. 신라 진평왕 때는 반역한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참수하고 아울러 9족을 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삼문, 이개 등의 사육신도 죽은 다음 시장에 효수됐고, 남이(南怡)장군과 그 모친도 시장에서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에 처해졌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도 시장 거리에서 처형됐다.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는 풍습 또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가뭄에 시장을 옮기는 것[移市]은 화려한 시장을 닫고 골목 등지로 옮겨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만 거래함으로써 근신을 실천하고 하늘을 감동시켜 비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또 우리 속담에 “장사 끝에 살인 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장에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시장에서 아녀자들이 싸움을 하다가 한 여인이 죽는 사건이 있었고, 땔나무를 싣고 온 소와 말을 빼앗기 위해 땔나무 장수를 살해한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근대에는 청상과 가격을 흥정하던 조선인이 몽둥이로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고, 일본인이 남대문시장에서 임신부를 곤봉으로 난타하여 중상을 입힌 사건도 있었다. 그 밖에도 시장에서는 각종 사기와 절도·강도사건 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예로부터 시장은 고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격구놀이·산대놀이·광대놀이 등을 펼쳐 왔으며, 오늘날에도 패션쇼와 불꽃놀이, 콘서트, 노래자랑 등 각종 명목의 행사와 축제를 벌여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거래한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능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같다. 하지만 거래되는 상품과 오가는 사람들, 시장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발전-소멸의 궤도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시장의 역사와 풍경 속에는 그때 그곳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시장은 시대와 생활문화를 비추는 거울이자, 문명 교류의 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