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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을 치유하는 함경북도 아리랑

2019-12-13

문화 문화놀이터


시름 너머에 피우는 희망
애환을 치유하는 함경북도 아리랑
'애원성(哀怨聲)'

    민요는 척박한 곳, 윤택한 곳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 마음속에 싹을 틔웠다. 심미성 짙은 예술성 보다는 생존의 현실성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북녘의 민요 ‘애원성’. 서도와 남도의 민요처럼 기교적이지 않지만, 함경도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고 듣는이의 공감을 일으키니 그것으로 족하다. 
    한반도의 북쪽 끝 추운 변방, 중앙에서 유배 된 사람들의 귀양처로 인식되던 곳이 바로 함경도이다. 돌아오기 어려운 길을 나선다는 뜻의 ‘산수갑산 간다’는 말도 함경도 ‘삼수’와 ‘갑산’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춥고 메마른 땅이어서 생활이 윤택하지 못했으나,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는데 애원성은 힘이 되어 주었다. 노래 제목처럼 애간장이 끓는 듯한 슬픔을 노래하는 ‘애원성’. 자기과시나 표현에 능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곤 하는 함경도 사람들일진대 어떠한 사연이 있어서 그리도 애절함을 토해냈던 것일까. 함경도 사람들이 직면했던 현실이 궁금해진다.
 
이북5도 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은 함경도의 대표적 민요로, 조선시대 6진 정책으로 새 땅을 일구어내는 시기에 원주민과 각처에서 온 이주민들의 생활사를 담고 있다.
 
애원성에 담긴 시공간, 그리고 사람
    함경도는 노령(露領), 즉 러시아와 인접해 있어서 두만강만 건너면 러시아 땅이다. 이 일대는 오랫동안 여진족과의 싸움에 시달려왔고, 조선시대 6진 정책으로 각처에서 온 이주민들이 새롭게 터전을 일구었다. 한말부터는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각축장이었으며, 1888년 함흥이 러시아에 의해 개항된 이래 반봉건 농민 봉기가 줄을 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함경도에서 벌어진 역사적 파란과 함경도 사람들이 겪었을 질곡은 트라우마와 빈곤만을 남겼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빈곤을 면해보고자 함경북도 접경지역으로 품팔이를 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함경북도에서 불리던 애원성이 ‘노령(러시아)노래’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함경북도 애원성>
    산은 산은 어화 東大山은 부모님 형제엔 離別山이다. 에~~
    海蔘威 항구가 그 얼마나 좋건대 新開殖이 찾아서 반봇따리로다. 에~~
    마우재 洋紙錢인가 경들었더니 왜놈의 卷煙紙에 꼭 속았구나. 에~~
    富寧 淸津 간 낭군은 돈벌러 가구 공동묘지 간 낭군은 영이별일세. 에~~
    울며불며 落淚하던 임은 삼년이 못가서 마우재妾을 했다네. 에~~
    믿지를 마오 믿지를 마오 동대산 간 낭군을 믿지를마오. 에~~~
    풍년이 왔다고 불지를 말어라 이물을 건너면 越江罪란다. 에~~
 
(左)애원성은 임과의 이별의 슬픔, 고단한 살림살이, 변방 사람들이 겪는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어서 제목 그대로 애원이 깃들어 있다.
(右)<애원성> 음반을 제작하기 위한 원반(原盤). 빅타축음기 주식회사가 제작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근대적 대중문화의 성장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음원이다.


    참담했던 일제강점기 함경도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이 배어있는 애절한 가사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 건너면 만주(滿洲) 간도(間島)이고, 동으로 건너면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항구였다. 나라를 잃은 쓰라림과 생활고를 함께 극복해야 하는 형편 속에서, 월강죄(越江罪)가 적용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러시아의 동대산(함경도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토크와 러시아 일대의 산들을 부르는 통칭)을 향해서 무단히 두만강을 건너고, 만주벌판을 향해 가족과 이별하였다. 신개식(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번 강을 건너간 사람은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았으니 강을 사이에 두고 희비의 사연들이 얽히고 얽혔다. 이렇게 시작된 유랑의 길에서 마우재(러시아 사람)와 일본인의 속임에 넘어가기도 하고, 각지에서 괄시를 받기도 했다. 떠날 때 굳은 마음으로 가족과 잘 돌아오겠노라 약속을 했건만, 어렵사리 강을 건넌지 삼년이 되어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을 첩으로 얻었다는 소문을 들은 아내는 강 너머를 바라보면서 그저 한탄을 할 뿐이다.
    함경도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부침 속에서, 근대 생활상의 아픔을 이렇게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함경도 사람들에게 애원성은 암울한 현실의 토로이자, 스스로를 달래는 치유제였다.
 
2005년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면서 남녘 실향민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시대 공감의 생명력을 지닌 노래, 애원성
    애원성은 혜산·갑산·무산·삼수 등 함경도의 아주 궁벽한 산골에서도 생활의 일부처럼 흔히 불렸다. 한 지역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은 향토적 공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애원성이 <어랑타령(신고산타령)>과 함께 함경도를 대표하는 민요이자 <아리랑>이라 할 만한 것은 시대상에 대한 정서적 공감 때문이다. 마치 <아리랑>이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민족의 정서를 하나로 엮어주듯이, 애원성은 함경도 사람들이 당면한 현실의 아픔을 덜어내 주었다. 임과 이별의 슬픔, 고단한 살림살이, 유랑민의 애환이 담긴 애원성은 혼자서 산길을 걸을 때에나 김을 맬 때에도 흥얼거리며 불렀고, 시름을 덜고 싶은 일상생활 어느 때나 즐겨 불렀다.
    가락 역시 수심에 잠겨 슬픔에 목이 메이게 하는가 하면, 높은 음으로 질러 내는 부분이 많아 슬픔이나 시름을 한껏 토해 내기도 한다. 원래 함경도 지역 민요는 여인들이 하소연하는 색조가 담긴 ‘애원성 조’가 특색인데, 애원성에도 하소연 억양과 흥겨운 굿거리 장단을 가미하여 한없이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노래에 명랑성을 입혔다. 마치 우울함을 보듬어주듯이 말이다.
    함경도 사람들의 삶이 담긴 이 노래는 이제 남녘에서 생명력이 돋보인다. 고향을 등지게 된 실향민들이 모여 애원성의 노랫말과 장단, 춤사위를 정리하여 이 땅에서 성장한 자녀들과 공유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다. 2005년에는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면서 실향민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이제 실향민들과 희로애락을함께 하는 애원성은 변화된 시공간에서도 여전히 그들의 애환을 치유해주고, 듣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