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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대나무 살, 그 위에 엮은 시간의 짜임

2019-10-11

문화 문화놀이터


기본 위에 꽃피운 창의
고운 대나무 살, 그 위에 엮은 시간의 짜임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보유자 서신정'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대나무를 가로세로로 엮어서 만든 고운 상자, 채상(彩箱). 과거 우리선조들은 이 채상에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의 함을 담기도 하고, 귀한 패물을 담는 반짇고리로 애용하곤 했다. 단단한 대나무에서 얇고 부드러운 속살을 뽑는 것도 신통하지만, 그 속살이 종이처럼 자유롭게 휘고 접히며 견고한 상자의 형태를 갖추는 것도 오묘한 일이었다.
    때문일까. 다산 정약용 선생은 채상을 일컬어 ‘비단과 같은 상자’라고 언급했다. 그 비단상자를 만드는, 국내에 단 한 명 존재한다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서신정 채상장 보유자를 만났다. 고운 대나무만큼 단아한 미소를 지닌 그는 대나무 속살처럼 담백한 이야기로 채상장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했다.
 
40년째 채상장의 길을 걷고 있는 서신정 보유자
 
채상이 나의 삶이 되리라고는 …
    9월의 한 날. 가을 햇빛이 곱게 땅을 비추던 하루, 전남 담양 죽녹원 자락에 들어선 채상장 전수관은 담양에 들른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묵묵히, 하지만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기능보유자 서신정 씨가 매일 채상 작업을 하는 이 곳에는 고운 비단처럼 단아한 색을 머금은 대나무 살이 빛을 뽐낸다.
    억센 대나무 속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살, 그것으로 만든 묵직한 채상이 이곳 전수관에 전시돼 있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가만히 물건을 들여다본 관광객들은 대나무 살의 정교한 짜임에 한 번 놀라고, 이 모든 것이 100% 수작업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인 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감탄을 자아낸다.
    이토록 현대적인 전통이라니. 이 쉽지 않은 일을, 이 작은 체구의 여인이 오랜 세월 이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관광객들의 입가에 감탄과 경이로움이 섞인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그런데 이곳 전수관에 오는 관광객마다 함박웃음을 지니며 채상에 호감을 보이는데도, 정작 서신정 전수자는 “전국적으로 채상을 아는 사람은 아마 10%도 안 될 것”이라면서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세월을 흘려보내는 듯한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거에는 채상이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채상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졌죠. 그러다 보니 제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없고, 무엇보다 일단 장인이 없어요. 채상을 만드는 일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해요. 대나무를 직접 대칼로 밀어 살을 뽑아내고, 그것을 엮고, 또 마무리하는 작업까지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거든요. 때문에 제품 하나를 만들어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죠. 지금 시대와는 어찌 보면 맞지 않는 일일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은 모든 게 빨리 돌아가니까요. 그런 채상 일을, 저도 제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채상장이었지만 어릴 때는그저 ‘아버지의 일’ 로 여기기만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영락없는 채상장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제가 만든 제품을 보고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 반응을 볼 수 있어 참 기뻐요. 가끔 이곳 전수관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기곤 한답니다.”
 
01.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어 만드는 채상
02. 곱게 물들인 대나무 껍질   03. 반짇고리 등 내방용 고리나 상자로 사용되는 채상
 
짜일수록 단단한 대나무처럼, 가족으로 엮은 채상의 길
    대나무 자생지인 담양은 예로부터 죽세공품이 발달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한 담양에서 채상장으로 평생을 살아온 서신정 보유자의 아버지 故 서한규 장인은 꼼꼼하고 빠른 손으로 견고한 채상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음에도, 그중 누구에게도 채상의 길을 강요하지 않았다. 때문일까. 일곱 자녀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때문에 故 서한규 장인은 언제나 묵묵히 홀로 대나무 살을 엮으며 채상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런데 그의 둘째 딸, 서신정 보유자가 그녀의 나이 열아홉 살에 아버지에게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아버지. 제가 채상 일 도와드릴까요?’ 딸의 질문에 故 서한규 장인은 ‘네가 도와주면 나야 좋지’라고 묵묵히 답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딸은 2인 1조가 되어 함께 채상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를 아직도 기억해요. 지금처럼 햇살이 좋은 하루였죠. 대청마루에 기대고 앉아 ‘앞으로 뭐 해먹고 사나’를 고민하는데, 저기 앉아 있는 아버지의 작은 등이 보이더라고요. 어느덧 늙어버린 아버지를 돕고 싶다, 이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채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제가 생각한 것보다 채상 일 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만큼 푹 빠져버렸죠. 혼자 새벽까지 도안을 만들고 고민하며 연구하다가 잠들기 일쑤였어요. 아버지를 보고 시작했지만 제 적성과도 아주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거죠.”
    학창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아 학교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미술 공부를 더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기도한 그다. 하지만 재능 있는 딸을 두었음에도 故 서한규 장인은 미술 선생님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냈다. 돈이 없는데 미술 공부가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돈이 없다’는 논리에 서신정 씨도 그녀의 선생님도, 아버지를 상대로 어떤 설득도 이어갈 수 없었다.
 
서신정 보유자는 전통채상을 현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말 가난했죠. 자식이 일곱이니 오죽했겠어요. 그 가난 속에서도 대나무 살을 만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 대나무 살을 만지는게 그저 좋아요. 왜 좋냐고 물으면, 글쎄요. 답을 할 수가 없어요. 그저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거든요.”
    아버지와 딸이 2인 1조로 하던 채상 작업은, 故 서한규 장인이 세상을 떠난 지금 남편과 아내가 2인 1조를 이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본래 인쇄업을 하던 서신정 보유자의 남편 김영관 씨도 채상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내와 장인어른 옆에서 채상을 접한 만큼 지금 김영광 장인은 현재 서신정 보유자 못지않은 채상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들 김승우 작가도 함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해 현재 서신정 보유자의 전수자가 됐다. 짜일수록 단단한 대나무 살처럼, 서신정 보유자의 가족들도 채상으로 단단하게 엮여 그들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인 것이다.